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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황홀한 언어의 춤사위, 그다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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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1.07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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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김박은경 시인 ‘못 속에는 못 속이는 이야기’

[시인의 집]황홀한 언어의 춤사위, 그다음은
2002년 ‘시와반시’로 등단한 김박은경(1965~ )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못 속에는 못 속이는 이야기’는 표제에 잘 드러나 있듯, 속이고 싶지만 속일 수 없는 이야기에 대한 고백록이다. 주어진 삶에 순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순응하고 싶지 않은, “사소한 것들이 좌우”(‘백치의 회복’)하는 운명을 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심경과 자유의지를 드러낸다. 어쩌면 두 번째 시집에서 말한 ‘중독’ “하나에 전부를 거는 위태” 이후의 ‘상실감’일지도 모른다.

시인은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이하 ‘시인의 말’)고, “다른 삶을 살고 싶었”고, “다른 시를 쓰고 싶었”지만 그리하지 못했다고 털어놓는다. 다른 사람은 ‘나’에 대한 부정이고, 다른 삶은 ‘나와 내 주변’에 대한 불만이고, 다른 시는 ‘내 시세계’에 대한 변화 모색을 의미한다. ‘다른’의 삶을 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는 시인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안다”와 “그럴 수 없다는 것은 안다”는 두 문장 “사이가 아득히 멀다”고 부연한다.

다르지 않은 문장이지만 무슨 차이가 있을까. 이는 단순히 ‘을’과 ‘은’의 음절이나 ‘을’은 목적격조사, ‘은’은 보조사로서 목적격으로 쓰임과 같은 문법적 차이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을’은 내가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막연히 아는 상태를, ‘은’은 내가 주체가 될 수도 있지만 그럴 수 없음을 확연히 아는 상태의 차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문장상으로 ‘다르다’와 ‘틀리다’쯤의 차이겠지만 시인에게는 삶과 죽음의 거리만큼 멀기만 하다.

불면이라고 하자 불멸이라고 했다 무섭다고 하자 무덥다고 했다 말에 말을 잇는데 말이 되지 않았다 시선이라고 하자 시신이라고 하자 마주보는 시신처럼 가능한 시선도 없이 떠다니는 웃음들 속삭임들, 아무도 없는데 떨어지는 책은 왜 자꾸 꺼지는 외등은 무슨 말을 해주려고 시계(視界)라고 하자 시계(時計)라고 한다 우리는 일치하는가, 아니 너무 많아 많은데 많아서 막막하지 시계는 죽어버렸어 광대하여 끝이 없거나 너머 저 너머에 또 너머가 있거나 너는 내가 지어낸 이야기 아니 우리는 서로의 이종, 다정을 잃었고 근친은 버렸고 고백은 무릎을 안고 우는 것 같다 생각하는 것과 생각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 돌아가고 싶어 이미 돌아왔다는데 기억나지 않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데 분명한 건 분명한 게 없다는 것, 죽여버렸으면 죽어버렸으면 누가 누군가

- ‘다른 이야기’ 전문


삶과 죽음은 이번 시집의 화두와 같다. 삶이 ‘불면’이라면 죽음은 ‘불멸’과 같다. 죽을 만큼 힘든 상황을 들키기 싫은 시인은 반복이나 나열과 같은 언어유희와 자유연상, 중의법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숨기려 하지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속내까지 감출 수는 없다. 삶의 고통은 “말에 말을 잇는데 말이 되지 않”는, 즉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관계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서로의 이종”인지라 “다정을 잃었고, 근친은 버렸”기에 결국 “죽여버렸으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토로한다.

죽여버리거나 죽어버렸으면 하는 그 “누군가”는 바로 ‘당신’이다. 시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대는 당신은 누구일까. 조사만 바뀌어 반복해서 등장하는 “당신이 당신을 당신의 당신에게 당신과 당신은”(이하 ‘당신의 적격’)에서 당신은 “말이 안 되는” 사람, 참고 견뎌야 하는 대상이다. 한때 가까웠지만 이제 “아득히 멀어”져 “당신이 아닌 것” 같은 사람이다.

오래 앓아 지루해진 당신이 묻네, 언젠가 지금과 다른 생이 있겠냐고 강물은 당신 발목을 향해 흐르고 두 갈래로 갈라지고 파문은 당신으로부터, 흔들리던 것은 흔들리는 수밖에 흘러가던 것은 흘러가는 수밖에 지금 묻고 있는 사람은 언제까지나 묻는 사람 지금 슬픈 사람은 언제까지나 슬픈 사람 당신을 잊을 수 없는 당신은 아마도 잃을 수도 없는 사람, 그 더운 이마에 얹으려고 강물에 손을 담그네 손을 따라 밀려오는 강물을 따라 번지는 빛을 따라 봄을 따라 참 아름다워서 죽기 좋은 날이라고 하겠지 병이 아닌 꿈이 없다고 독이 아닌 숨이 없다고 눈을 감은 채 하는 질문은 가만하고 부드럽고 실컷 어리석은 것, 어리광처럼 초록이 간지러운 강가에서 따뜻한 입김에 기대고 싶겠지만 아니요, 아닙니다

- ‘언젠가 지금과 다른 생’ 전문


“오래 앓아 지루해진” 당신이 앓고 있는 건 ‘신병’(身病)이라기보다 말이 통하지 않는 답답함, “먹고사는 것”(‘의자가 있다’)의 무책임, 애인과 아내를 다 원하는 “선악과 관련없이 슬픈 정서”(‘애인과 아내’)로 인해 생겨난 ‘마음의 병’이다. 거기서 파문과 상실이 시작되었는데 당신은 천연덕스럽게 “지금과 다른 생이 있겠냐”고 묻는다. 그 질문은 쉽게 답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서 “지금 슬픈 사람은 언제까지나 슬픈 사람”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궁극적으로 당신의 질문은 “다른 생”을 말하고 있지만 현재 “당신 발목”은 이 땅에 있으므로 ‘나를 버리지 말아 달라’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당신은 “잊을 수 없”고, “잃을 수도 없는 사람”이지만 “병이 아닌 꿈”이나 “독이 아닌 숨”이 없으므로 단호하게 “아니요, 아닙니다” 매몰차게 말하고 돌아선다.

당신과의 인연은 “자명한 실패”(이하 ‘관계들’)을 동반하므로 더 이상 “행복하지 않”다. 당신이 추구하는 불멸, 즉 영원은 “광대하여 끝이 없거나”, “저 너머에” 있거나,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우리 영원토록 어깨동무”를 하자고 했지만 “이제 제발 놔”달라고 사정한다. 자칫 중의적 문장과 무희처럼 휘두르는 언어의 춤사위에 현혹되면 “순정한 이 비극”(‘보통의 불우’)을 놓칠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압화가 있다 얇다 작다 길다 검다 희다 언뜻언뜻 붉은 씨방이 보인다 씨앗들이 보인다 기억은 만개의 순간을 놓지 않는다 저 꽃가지쯤에 앉았겠지 피어나기 시작한 새와 어지러이 날아가는 꽃송이라니 황홀이라고 바로 지금이라고 더욱 눈 감지 않고 날지 않으며 허기도 연명도 없다고 충분히 높고 깊어 더 이상 향할 곳이 없다고 완벽이라고 최후를 울었겠지 그대로 영원이 되었을 텐데,

여기 한 송이 길조가 피어 무구한 낙화들을 예언할 때 오월은 다음을 향해 저녁은 다음을 향해 사라지는 것은 더욱 사라지고 유한은 무한은 서로의 다음이 된다 새였던 것이 꽃이었던 것이 그것이었던 것이 아닌 것이 된다 희박해진다 대기는 온갖 것들로 가득해 온 사방 그것이 아닌 것이 없어 나는 새 나는 꽃 나는 불 나는 밤 나는 날고 나는 피어나고 나는 뜨겁고 나는 어둡다

나를 위해 죽고 싶은 사람을 위해 죽고 싶어 당신도 같다면 우리는 한통속, 분별이 없어 똑같은 고백과 이별이 되풀이된다 한다 실수와 실패를 되풀이한다 능동과 피동을 뒤섞는다 뒤섞인다 어지러워 서둘러 다음이 되고 싶어 가능의 불가능의 그다음이 되고 싶어 이상한 결론의 방식이 마음에 들어 더 멀리 있는 별이 더 빨리 사라진다고 했지 우리는 그것을 재촉하고 어디서든 새는 최선을 울고 황홀은

- ‘황홀은 그다음’ 전문


꽃은 가장 화려한 만개(滿開)의 순간에 잘려 압화가 된다. 납작하게 눌린 압화에 씨방과 씨앗들을 본 시인은 막 “피어나기 시작한 새와 어지러이 날아가는 꽃송이”에서 ‘황홀’을 본다. 피어나는 것은 꽃이고, 날아가는 것은 새 떼지만 압화를 통해 본 상상의 세계인지라 의도적으로 자리를 바꾼다. “꽃가지쯤에 앉”은 꽃이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라면 압화는 일그러진 세상인 셈이다.

시인의 의도는 새와 꽃의 자리를 바꾸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녀야 할 새는 압화가 되어 죽지도 못하고, “날지 않으며 허기도 연명”도 없는 상황에 처한다. 압화는 그대로 “충분히 높고 깊어 더 이상 향할 곳”도 없다. 자체로 완벽이고, 최후이고 영원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꺾여 갇히고 장식된 압화는 시인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이하 ‘우리의 버릇’)라는 메모를 남기고 죽은 “송파구 석촌동 지하 1층” 모녀나 “살아 있으니 사월”(‘꽃피는 외딴’)을 되새겨볼 때, 압화의 의미는 단순히 압화 자체나 자화상에 머물지 않는다. “무구한 낙화들을 예언”이나 “다음을 향해”가는 오월이 지향하는 사회성은 이 시집의 성격을 규정하는 또 다른 잣대로 작용한다.

이처럼 김박은경의 시세계는 “온갖 것들로 가득해 온 사방 그것이 아닌 것이 없”을 만큼 깊고 넓다. “만개의 순간을 놓지 않는” 기억과 화려한 언어의 춤사위를 보고 있으면 더불어 황홀해진다. 그 춤사위가 멈추면 황홀이 상실과 연민과 한(恨)의 다른 이름이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시인은 “불가능한 울음을 삼키며”(‘어디는 있고 우리는 없고’) 해맑게 웃고 있다.

◇못 속에는 못 속이는 이야기=김박은경 지음. 문학동네 펴냄. 120쪽/ 1만원.


[시인의 집]황홀한 언어의 춤사위, 그다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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