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홍수시대 피로감 누가 해결해주나?

'오징어게임'(사진 왼쪽 위사진부터 시계방향으로), '프렌즈', '그레이아나토미', '고요의 바다'.

새해가 될 때마다 TV 보는 시간을 줄이겠다는 결심을 한다. 드라마 한 편 볼 시간에 책을 읽거나 운동을 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파이팅을 외친다. 올해는 ‘넷플릭스를 열고 나서 콘텐츠를 찾아 헤매는 시간을 줄이겠다’ 쪽으로 결심을 약간 수정했다. 요새 유행 중인 신조어 중에 ‘넷플릭스 퍼티그(Fatigue)’라는 말이 있다. 콘텐츠가 과도하게 많아 앱을 열 때마다 무엇을 봐야하는지 결정을 못해 생기는 피로감을 의미한다. 수천 명의 엔지니어가 구현한 알고리즘이 몇 가지를 추천해주지만 나도 잘 모르는 내 충동적 선택 패턴을 컴퓨터 사이언스가 해결해줄 수 있을지 의심이 든다. 이런 피로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자 넷플릭스는 ‘랜덤’ 재생 기능도 추가했다. 시간낭비 콘텐츠를 보면서 인간인 자신의 선택과 불운에 실망하느니 테크놀로지에게 책임을 돌리는 게 마음이 편할지도 모른다.


비단 넷플릭스 안에서만 벌어지는 상황은 아니다. 유례없는 콘텐츠 황금 시대를 맞이해 스마트폰, 태플릿, 스마트 TV로 언제 어디서든 조금이라도 지루하면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켜고 무언가를 볼 수 있다. 콘텐츠 트렌드를 쫓아가려면 비용과 시간 투자는 기본이다. 넷플릭스와 왓차를 기본으로 디즈니 플러스에서 마블 드라마 시리즈, 티빙에서 '도시술꾼여자들', 웨이브에서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와 '석세션', 애플TV플러스의 '디킨슨' 등을 챙겨보려면 개인 부담 한달 구독료가 5만원을 훌쩍 넘어간다. 가족 계정을 활용하거나 모바일 프로모션을 받는다면 비용이 반으로 줄어드니 그나마 다행이다. 어쨋거나 개인이 TV를 보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각 스트리밍 서비스는 구독자의 귀한 시간을 차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모든 글로벌 OTT 플랫폼의 구독자가 어느 정도 기준에 다다른 2022년, 이 경쟁은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유명한 콘텐츠는 많지만 양에 있어 약세인 디즈니 플러스는 2022년에 콘텐츠 제작에만 33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드라마 '헤일로'가 비장의 무기인 파라마운트 플러스는 2022년부터 티빙에 독점으로 콘텐츠를 공급한다. 애플TV플러스는 넷플릭스에서 '아일리쉬맨'으로 성공을 거둔 마틴 스코시지 감독과 다년 계약에 성공하고 그의 영화와 TV 시리즈를 몇년간 독점 공개한다. 모두들 콘텐츠 확장 및 인재 확보를 위해 통큰 베팅에 나선다. 지난해 11월에 열렸던 아메리칸 필름 마켓에서는 제작자들 사이에서 ‘제2의 '오징어 게임'을 개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글로벌 OTT 서비스의 그야말로 전지구적 영향력을 보여준 '오징어 게임'이 이제 OTT 컨텐츠의 기준이 되었다.


모두들 콘텐츠 제작에 매진 중인 가운데, 정보 기술 서비스 회사인 ‘어센처’의 설문에 따르면 구독자의 반 이상이 원하는 콘텐츠를 찾지 못해 화가 난 적이 있다고 한다. OTT를 좀 봤다 하는 사람이라면 찾고 있는 콘텐츠를 구독하고 있는 OTT에서 찾을 수 없어 실망한 순간이 꽤 많을 것이다. 그렇다고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또 다른 서비스를 구독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전문가들은 2022년부터 콘텐츠를 대형 OTT 서비스의 콘텐츠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는 서비스가 중요해질 거라 예측한다. 익히 우리가 대형 포털 사이트에서 뉴스를 보며 오랫동안 경험해온 수집(어그리게이터) 서비스가 선택 장애 및 콘텐츠 검색 블랙홀에 빠진 구독자들을 구원하러 나선다. 이미 콘텐츠 대여/판매 중인 아마존과 애플, 구글 등이 콘텐츠 큐레이션을 통해 구독자와 콘텐츠 사이의 길을 정비하고 있다. 영화와 TV 시리즈만 정리의 대상이 아니다. 게임과 음악도 나란히 지속적으로 재정비에 들어간다. 특정 콘텐츠를 찾는 이들을 대상으로 콘텐츠 생산자와 유통자 간에 새로운 수익 모델이 만들어질 가능성도 다분하다.


이미 미국에서는 특정 OTT 서비스에서는 추가 비용없이 즐길 수 있는 영화를 다른 플랫폼에서 시청하려면 대여나 구매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을 보려면, 공교롭게도 디즈니 플러스에서 볼 수 없고 훌루 구독자에게만 공개된다. 아니면 아마존이나 구글 등에서 2달러 넘는 돈을 주고 대여를 해야한다. 한편, 시대를 대표하는 공중파나 케이블 TV 방영작의 경우 여전히 프리미엄이 붙는다. 팬들이 몇 번이고 재감상을 하기 때문이다. '프렌즈'나 '그레이 아나토미'같은 드라마는 언제나 스트리밍 시간 순위 상위권이다. 놀랍게도 미국의 시청자들은 새로운 시리즈를 용기내어 시작하는 대신 좋아하는 명작 시리즈를 다시 보는 것을 즐긴다. 선택 장애 같은 괴로움과 거리가 먼 이들이다.


앞서 말한 설문 조사에 응답한 구독자의 반 이상이 콘텐츠를 선택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6분 이상이라고 말했다. 6분에 걸쳐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최고 기술자들이 총력을 다해 유혹의 구조를 설계하고 있다니 마치 내 손끝이 엄청난 가치를 가진 것처럼 느껴진다. 어떤 콘텐츠를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 넷플릭스 10위권 안에 진입한 새 콘텐츠를 볼 것인가, 다시 보고 싶은 드라마를 회기할 것인가, 아니면 놓쳤던 영화를 모처럼 감상할 것인가. 좀비 드라마를 볼까, 따뜻한 시트콤을 볼까, 날카로운 풍자극을 눌러 볼까. 무엇이 우리의 선택을 좌우하나. 디스플레이 이미지? 소개글? 배우? 감독? SNS 트렌드? 친구의 추천? 이유가 무엇이든 스크롤을 한없이 내리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뭐라도 맛을 보는 게 낫다.


OTT 플랫폼은 구독자에게 이전에 없던 새로운 습관을 형성하고 있다. 콘텐츠 자체가 가진 힘을 비롯 콘텐츠를 선택하는 시간을 줄여주는 서비스, 그리고 원하는 콘텐츠를 찾기 편하게 도와주는 플랫폼이 2022년을 스트리밍 시장을 이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