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 스물하나', 98년의 청춘이 지금 소환된 이유

사진 제공 = tvN ‘스물다섯 스물하나’

청춘(靑春)이란 단어만큼 싱그러운 것이 또 있을까. 만물이 푸른 봄철, 10대 후반에서 20대에 걸치는 인생의 젊은 나이, 또는 그 시절을 뜻하는 단어. 동시에 청춘은 곧잘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식으로 불확실하여 불안하고, 막막하게 흔들리는 시기를 뜻하기도 한다.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그 청춘을 달리는 열여덟 살 나희도(김태리)와 스물두 살 백이진(남주혁)을 조명한다. 흥미롭게도 이 청춘들의 시대는 현재가 아니라 24년 전인 1998년이다.


1998년은 IMF 외환위기로 온 나라가 극심하게 흔들리던 때다. 미국 직배 영화에 맞서 스크린쿼터를 요구하는 영화인들의 시위 모습이 나오고, 국가의 부채를 갚기 위해 국민들이 집안에 고이 모아둔 금가락지 등을 자발적으로 내놓는 금 모으기 운동이 뉴스를 장식하던 때.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무언가 잃어가나 보다. 그렇지만 나랑은 상관없는 어른들의 일이다. 난 뭔가를 잃기엔 너무 열여덟이니까’라고 외치던 나희도에게도 IMF의 여파가 직격으로 미친다. 심장이 떨릴 정도로 좋아하던 펜싱을 5년을 해오고 있었건만, IMF 때문에 희도의 고등학교 펜싱부가 폐지되기 때문.



희도에게 펜싱은, 그리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며 펜싱의 정점에 선 동갑내기 선수 고유림(보나)은 꿈이자 동경이다. 내가 지닌 꿈은 남이 빼앗을 수 없는 것인 줄 알았건만, 펜싱부 담당 선생님은 싸늘하게 말한다. “니 꿈을 빼앗은 건 내가 아니야. 시대지.” 없어진 펜싱부 대신 고유림이 있는 태양고등학교로 전학가려 하지만 슬럼프에 빠져 성적을 내지 못하는 희도에게 엄마 재경(서재희)은 펜싱을 포기하라고 할 뿐이다. 어릴 때 시작은 ‘펜싱신동’이었건만 지금은 국가대표는커녕 그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하는 선수일 뿐이니 엄마의 반응은 일견 합리적일 수 있겠으나 열여덟의 나이에, 꿈이자 동경이라 표현할 만큼 좋아하는 펜싱을 포기하라 하여 순순히 ‘네’ 하고 포기한다면 그것이 과연 열여덟이겠는가. 동급생 폭행이나 미성년자 신분의 나이트클럽 출입이라는 일탈을 감행해 강제전학도 불사하겠다는 야무지고도 잘못된 계획을 세우는 게 열여덟 살이라고.

사진 제공 = tvN ‘스물다섯 스물하나’

나희도를 연기하는 김태리는 1990년생. 자신의 나이보다 무려 열다섯 살이나 어린 여고생이 되었으나 김태리가 지닌 압도적인 동안의 덕으로 누구도 어색하지 여기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분한다. 나이 차를 극복하고 교복을 입는 연기를 펼칠 때 배우들이 쉬이 범하는 실수가 과하게 밝은 연기 톤을 보여주는 건데,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김태리의 여고생 연기에는 과하다는 평이 그리 많지는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떤 역할을 맡든 맞춤옷 입든 완벽한 변신을 꾀하는 연기로 보는 이를 사로잡은 김태리의 열연 덕분. 목표를 향해 무모하게 돌진하면서도 부끄러울 때는 남의 시선 상관없이 거침없이 울음을 터트리는 순진무구함을 김태리는 자유자재로 오간다.



그래도 여중생도 아니고 여고생인데 나희도가 너무 풋풋하고 너무 무모하고 너무 순진무구한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나도 잠깐 그랬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희도는 펜싱에만 매진했던 운동부 출신이기도 하거니와 그 시절을 겪어온 우리 세대만 그렇게 생각하는진 모르겠으나 그때는 지금보다 청춘들이 덜 삭막하고 더 순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적어도 어른들이 꿈을 물었을 때, “꿈 같은 게 필요하긴 한가? 다들 취업 얘기만 하잖아”라고 말하는 2022년의 열다섯 살 김민채(나희도의 딸)처럼 말하진 않던 시대로 기억한다. 인터넷이 발달했던 시대도 아니라 1998년에 온갖 폼을 잡으며 시니컬한 척 했던 여고생이던 나도, 결정적인 도움의 순간에는 백이진의 말처럼 ‘그 나이만의 특혜’에 기대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곤 했으니까. IMF가 그때의 청춘들의 꿈을 빼앗으려 들었을지언정 그래도 지금처럼 더 많은 부(富)만이 성공의 가장 큰 척도라 여기진 않았던 시대였다고 그때를 기억한다.

사진 제공 = tvN ‘스물다섯 스물하나’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1998년에 만난 나희도와 백이진이 제목처럼 각각 스물하나와 스물다섯 살이 되는 2001년까지를 중심으로 다루며 그 시대 청춘의 성장을 묘사할 것으로 보인다. 2001년은 우리나라가 IMF로부터 지원받은 195억 달러의 차입금을 모두 상환했던 상징적인 해. 이 드라마가 무거운 시대 속에서도 청춘들이 성장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청량하게 그려내어 그 시절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건 물론, 팬데믹으로 어려움을 겪는 지금의 청춘에게 무언의 위로를 건넬 것이 예상된다. 마치 IMF 외환 위기 이후에 인기를 끌었던 ‘국희’ ‘은실이’ ‘육남매’ 같은 드라마들이 그보다 더 어려웠던 1950~1960년대 과거를 소환했던 것처럼.


원수연의 메가히트작 ‘풀하우스’, 파란색 채팅 화면으로 통칭되던 PC통신, 삐삐, 자우림의 노래,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만화대여점과 비디오대여점, 지금이나 예전이나 다이어리 꾸미기에 진심이었던 10대의 순수 등 중장년층의 복고 감성을 건드리고, 청춘과 청량을 온몸으로 체화한 것 같은 김태리와 남주혁을 내세운 ‘스물다섯 스물하나’. ‘풀하우스’에 목매진 않았지만 하교 후 서클 활동과 분식집•만화대여점 순례에 진심이었던, 중년 나희도의 동년배 눈에는 김태리가 연기하는 열여덟 나희도가 무척이나 반갑고 설레고 그립고 아련하다. 지금 열여덟 청춘들도 이 순간의 소중함을 실감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