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와 명예 모두 가졌던 김정주...무엇이 그를 힘들게 했나

지난해 3월 8일 오후 대전 유성구 한국과학기술원(KAIST) 대강당에서 열린 이광형 제17대 KAIST 신임 총장 취임식에서 김정주 NXC 대표가 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뉴스1

부와 명예를 모두 이뤘는데, 무엇이 그를 힘들게 한 것일까. 김정주 넥슨 창업자가 지난달말 돌연 별세한 것과 관련, 업계에 추모 분위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생전 그를 고민케 하고 옥죄어온 화두들이 함께 회자된다.

김 창업자는 게임 불모지 한국에서 글로벌 게임사 넥슨을 일구며 11조원의 대자산가 반열에 올라섰다. 하지만 누구보다 허례허식을 싫어했고 소탈하며 차분한 성격으로 알려져있다. 같은 색의 티셔츠를 여러벌 돌려 입고 평소엔 비서진이나 수행비서, 운전기사 없이 혼자 다니길 즐겨했다. 업무회의에 백팩을 메고 불쑥 나타난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직원들도 있었다. 어린이 재활병원에 거액을 기부할 정도로 마음씨도 따뜻했다. 그러나 여린 성격이었을까. 대외 행보는 되도록 꺼려했다. 은둔의 경영자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일련의 사건사고는 그를 괴롭혔다. 2016년 국정농단 사태에 휘말리며 친구와의 관계가 '뇌물'로 공격 받고, 그 이전엔 동문인 김택진 엔씨소프트 (216,500원 ▲1,000 +0.46%) 대표와 경영권 분쟁으로 의가 상했다. 무엇보다 소탈한 성격과 달리 '돈 밝히는 기업인'이라는 오해가 따라붙으면서 적잖게 상심한 것으로 보인다.
게임업계 비즈니스모델 선도하며 '넥슨=돈슨' 오명

바람의 나라: 연 /사진=넥슨

넥슨은 게임업계 선구자답게 콘텐츠 개발과 함께 다양한 비즈니스모델에 대한 실험을 이어왔다. 2000년대 초반 PC방 정액제(부분 유료화)와 함께 캐시템 같은 부분 유료화 모델 역시 넥슨이 시작했다. 캐시템은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선 과금을 해야하는 P2W(Pay to Win)의 효시다. 이는 김 창업자의 넥슨이 돈을 밝힌다며 '돈슨'이라는 오명을 쓰게 만들었다.

이후 엔씨소프트 등 다른 게임업체들도 확률형 아이템을 내놓으면서 초기 넥슨의 모델을 뛰어넘는 과금 시스템을 도입했지만, 오명은 고스란히 넥슨의 몫이었다. 이른바 선구자의 비애다. 이 같은 비즈니스 모델이 초기 게임사의 지속가능한 생존과 새로운 게임개발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목소리도 나오지만, 십수년간 무료 콘텐츠에 익숙해있던 일반의 인식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넥슨 게임이 수익만을 추구했던 건 아니다. 특히 2004년 서비스를 시작한 마비노기의 경우 경쟁작들과 달리 하루 2시간의 무료시간을 제공하고, 무료시간 중 일부 공간에서는 접속이 끊어지지 않도록 해 유저들간 연결성을 극대화했다는 평을 받는다. 하지만 이 같은 시도는 이후 급격히 불어난 넥슨의 규모와 영업익 등의 수치 앞에서 설 자리를 찾기 힘들어졌다.
30년지기 김택진과의 불협화음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 /사진=뉴스1

김정주 창업자는 2012년 엔씨소프트와 손잡고 미국 EA(일렉트로닉 아츠)를 인수하기 위해 넥슨 일본법인이 엔씨소프트 지분 14.68%를 매입하도록 했다. 당시 EA 인수는 실패했고, 둘 사이엔 어정쩡한 지분 관계만 남았다. 이후 넥슨이 엔씨소프트 지분율을 높이고 경영권 참여를 선언했으며 엔씨는 넷마블을 백기사로 영입해 경영권 방어에 나서면서 사이가 틀어졌다.


2015년 넥슨이 엔씨소프트 지분을 전량 매각하면서 꼬였던 지분 관계는 정리됐지만 김정주와 김택진, 두 게임업계 거물 사이에는 앙금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대학 1년 선후배로 서로 '형 동생'이라 칭하며 우애 좋던 둘은, 엔씨소프트 경영권분쟁 와중에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으로 해석됐다.

다만 지분 정리 이후 심정적 화해가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김택진 대표는 지난 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김정주 창업자를 애도하면서 "내가 사랑하던 친구가 떠났다. 살면서 못느꼈던 가장 큰 고통을 느낀다"고 남겼다. 이어 "같이 인생길 걸어온 나의 벗 사랑했다. 이제 편하거라 부디"라고 덧붙였다.
친구 진경준 검사장에게 건넨 주식…국정농단 사태에서 고통 받은 김정주

김정주 NXC 당시 대표(가운데)가 공짜주식 뇌물을 주고받은 혐의로 2016년 8월 16일 오후 진경준 전 검사장과 첫 재판이 열리는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으로 들어서고 있다. /사진=홍봉진기자 honggga@

2016년 박근혜 대통령 국정농단 사태에서도 김정주의 시련은 이어졌다. 2005년 비상장 상태이던 넥슨 주식을 대학 동기인 진경준 전 검사장이 사들여 160억원을 마련하는 등 40배 넘는 차익을 거뒀다는 이유 때문이다. 진 검사장은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됐고 이를 건넨 김정주 창업자 역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대법원은 2017년 진 검사장이 받은 주식 등에 대해 대가성에 인정되지 않는다며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다만 이는 법리적 해석일 뿐, 이를 '보험 성격이었다'고 말한 김 창업자의 발언은 두고두고 회자가 됐다.

김 창업자는 이후 입장문을 통해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자녀들에게 경영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공언을 했다. 그가 2019년 넥슨 지주사인 NXC 지분 전량을 매각하겠다고 밝혔을 때도 세진풍파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재산을 정리하고, 게임 개발자의 '초심'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평이 나왔다. 다만 당시 시장에서 NXC 지분가치에 대한 견해차가 커지면서 매각은 불발에 그쳤다. 한 게임업계 관계자는 "창업자들은 수시로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고독하기 쉬운데 김정주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라면서 "매각이 불발된 이후 기업가치가 급상승해 천우신조라 했지만 그게 도리어 그를 더 옥죈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