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트메어 앨리', 기예르모 델토로의 매혹적인 필름 누아르

'나이트메어 앨리', 사진제공=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지난 10년 영화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엔딩.” 미국 잡지 포브스의 리뷰를 인용한 ‘나이트메어 앨리’의 포스터 홍보 문구다. 영화의 결말은 정말 충격적일까. 거두절미하고 답은 그렇다이다. 우선,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즐겨 다뤄왔던 괴물이나 유령을 등장시키거나 그로테스크한 시각적 연출로 충격파를 주는 결말이 아니라는 점이 놀랍다. 오로지 분위기와 상상력으로 관객을 악몽으로 몰아넣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연출력은 가히 위력적이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열한 번째 장편 영화 ‘나이트메어 앨리’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2018) 이후 4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이다. 전작은 언어장애를 지닌 여성과 괴생명체의 사랑을 그린 판타지 멜로 영화로 델 토로 감독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며 2018년 90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미술상, 음악상 4개 부문 최다 수상 기록을 세웠다. ‘나이트메어 앨리’ 역시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촬영상, 의상상, 프로덕션 디자인상 4개 부문 후보에 올라 개봉 전부터 기대감을 높였다.



영화의 결말뿐 아니라 ‘나이트메어 앨리’는 세계적 거장이 전작의 성공으로 드높아진 기대에 부응하는 영화다. 판타지, 호러 장르를 주로 선보이던 델 토로 감독은 처음으로 필름 누아르 장르에 도전했다. 그가 새 영화의 원작으로 선택한 작품은 연출한 ‘헬보이’ 시리즈의 주연배우 론 펄먼의 추천으로 처음 접한 윌리엄 린지 그레셤의 장편 소설 ‘나이트메어 앨리’(1946)다. 원작은 서커스와 카니발 세계를 배경으로 한 사기꾼의 몰락을 그린 누아르 소설로 ‘신랄하고도 훌륭한 책’ ‘시간이 묻어버린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47년에 처음 영화화되었는데 당시 할리우드 인기 배우였던 타이론 파워 주연의 동명 영화는 국내에서 ‘악몽의 뒤안길’ ‘악몽의 골목’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미국 고전 누아르다.

'나이트메이 앨리', 사진제공=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영화는 주인공 스탠턴 칼라일(브래들리 쿠퍼)이 카니발 쇼단을 찾아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원작보다 앞선 시점에서 출발한다. 원작에 묘사되지 않은 스탠턴이 집을 떠나는 첫 장면은 결말의 충격만큼은 아니어도 앞으로 펼쳐질 한 남자의 파란을 예고하는 불씨 역할을 한다. 과거를 묻고 새 출발에 나선 스탠턴은 우연히 찾아간 카니발 쇼단에서 일자리를 얻고 독심술사 지나(토니 콜레트)와 불륜 관계를 맺으며 사람의 마음을 읽는 비결을 습득한다.



영화의 전반부는 ‘초짜’ 스탠턴이 비열한 전문 사기꾼으로 올라서기까지 카니발 생활을 공들여 다룬다. 스탠턴이 카니발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관객들도 카니발 세트 구석구석을 조용히 누비는 카메라와 함께 이곳의 삶을 응시하게 된다. 카니발의 동료들은 단장부터 기인(Geek), 독심술사 부부 그리고 전기 쇼를 하는 몰리(루니 마라)까지 스탠턴의 야망과 욕망을 자극하는 인물들이지만, 델 토로 감독은 이들을 단순한 악인이나 가볍고 우스꽝스러운 볼거리로 다루지 않는다. 사회적 약자 캐릭터가 제대로 숨을 쉬는 마법을 보여준 영화가 ‘셰이프 오브 워터’였다면, 이번 영화에선 밑바닥 인생 캐릭터들을 온전한 존재로 대우한다.


카니발을 떠난 스탠턴과 몰리 커플이 뉴욕 상류층을 상대로 심령술 사기극을 벌이는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영화는 본격적으로 필름 누아르의 색을 띤다. 성공에 집착하면서 불안에 시달리는 스탠턴과 어떻게든 사랑을 지키고픈 몰리의 갈등은 깊어지고, 이들 사이에 속내를 알 수 없는 정신과 의사 릴리스 리터(케이트 블란쳇)가 등장하면서 치정과 배신, 탐욕이 뒤엉킨 어둡고 위험한 범죄 사기극이 전개된다. 릴리스 박사의 상담실은 스탠턴과 릴리스가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음모를 꾸미는 후반부의 메인 세트로 등장한다. 상담실 장면에서 인물을 비추는 조명과 촬영은 고전적인 필름 누아르를 상기시킨다.

'나이트메이 앨리', 사진제공=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브래들리 쿠퍼는 어둡고 나약한 인물의 심리를 적정선에서 조율하는 고도의 연기를 펼친다. 안티히어로의 감정에 동의할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질 틈을 내어주지 않고 캐릭터에 몰입하게 만들다가 마지막에 가선 파괴력 넘치는 연기로 관객의 숨을 죽이게 만든다. 등장하는 순간부터 고혹적인 카리스마로 압도하는 케이트 블란쳇은 팜파탈의 전형을 탈피하며 위엄을 세운다. 루니 마라는 맞춤옷처럼 꼭 맞는 청순가련 역할을 수행했다. 윌렘 대포부터 토니 콜레트, 론 펄먼, 리처드 젠킨스까지 연기 바통을 이어 받듯이 등장하는 대단한 배우들 역시 이름에 걸맞은 연기로 응수한다.


‘나이트메어 앨리’가 기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 중에서 괴물(크리처)이 나오지 않는 영화라는 소개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크리처 대신에 영화에는 괴물로 살아가야 하는 인간, 괴물처럼 보이는 인간 그리고 욕망의 노예가 되어 스스로 괴물이 되는 인간이 등장한다. 그러니 델 토로 감독이 괴물도 안 나오는 누아르 영화를 만들었다고 서운해하지 말기를. 거짓말로 사람들을 속이고 헛된 희망에 돈을 쓰도록 현혹하던 사기꾼이 파멸하는 정해진 수순의 이야기임에도 정교하게 세공된 연출 덕분에 러닝타임 150분을 만끽하면서 볼 수 있다. 만족을 모르는 한 남자의 비극은 욕망을 좇는 현대인을 반영한다. 지금 나는 어느 정도로 ‘괴물화’가 되어 있나 자문하게 된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괴물보다 끔찍한 인간의 심연을 들추는데 성공한다. 절망과 슬픔을 파고드는 솜씨가 매혹적이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이름은 건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