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상 없이 심장근육 망가뜨려 사망…의사도 알아채기 힘든 '이 병'

윤종찬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순환기내과 교수/사진=이창섭 기자

트랜스티레틴 아밀로이드 심근병증(Transthyretin amyloid cardiomyopathy·이하 ATTR-CM)은 아밀로이드가 심장 근육에 침착돼 심장 기능이 약해지는 질환이다. 간에서 만들어지는 트랜스티레틴(Transthyretin)은 우리 몸의 운반 단백질이다. 일반적으로 4개 입자가 결합된 형태이지만 이유 없이 하나로 뭉쳐지는 순간 실타래처럼 엉킨 원섬유(Fibril) 형태의 비정상적 단백질인 아밀로이드를 생성한다. 이 아밀로이드가 인간의 장기에 침착하는 질환이 '아밀로이드증'이다.

아밀로이드가 심장에 쌓이면 ATTR-CM이 된다. 이 병의 무서운 점은 특별한 증상이 없어 천천히, 미끄럼틀 타듯 심장 근육을 망가뜨린다는 것이다. 실제 의료 현장에서 다수의 ATTR-CM 환자를 진료한 경험이 있는 윤종찬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순환기내과 교수는 "연구에 따르면, 처음 만나는 의료진에게 ATTR-CM을 진단받는 비율은 10% 미만"이라며 "두 번째와 세 번째는 각각 20%다. 평균 3~4명의 의사를 만나야 진단이 가능하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윤 교수는 "처음에는 운동 능력만 다소 약해지고 피검사에서도 확인되지 않지만, 침착이 진행돼 신경병증으로 발전하거나 심장 초음파에서 나타나야 진단이 가능하다"며 "의료진이 봤을 때 전형적이지 않은 심부전이거나 또는 말초 신경병증으로 손 저림을 호소하거나, 심장초음파 검사에서 이상 증상이 있으면 ATTR-CM을 의심해야 한다고 개원가와 종합병원 의료진에게 알리고 있다"고 말했다.

다행히 최근에는 '핵의학 검사' 등장으로 진단이 비교적 쉬워졌다. 기존에는 심장에 관을 넣는 침습적 방법으로 진단해야만 했다. 핵의학 검사는 방사선을 이용한 영상 검사로 비침습적으로 ATTR-CM을 구분할 수 있다.

윤 교수는 "ATTR-CM은 증상을 의심하지 않으면 진단이 안 된다"며 "보다 많은 ATTR-CM 환자가 빠르게 진단받고 필요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심장 초음파나 건강검진 진료를 보는 의료진도 의심 소견이 있으면 핵의학 검사를 적극 권고해주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ATTR-CM은 적기에 치료받지 못하면 수년 이내 사망할 수 있는 치명적인 질환이다. 유전자 돌연변이로 발생하는 '유전형' 환자의 생존 기간은 2.5년, 고령화로 발생하는 '일반형'은 3.6년으로 알려져 있다. 윤 교수는 "조기에 진단해서 빠르게 치료를 시작한다면 생존 기간은 더 늘어날 것"이라며 "이미 침착이 시작되고 치료를 시작하면 효과가 덜 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윤종찬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순환기내과 교수/사진=이창섭 기자

특히 유전자 돌연변이로 발생하는 유전형은 젊은 나이에도 증상이 발현한다. 유전형 ATTR-CM 환자 가족이라면 유전자 검사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 윤 교수는 유전자 변이가 있다고 해서 100% 발병하는 건 아니지만, 자녀 세대에서 증상이 발현하기 전에 선제적으로 진단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현재 희귀 난치 질환 지원 사업으로 국가에서 ATTR-CM 환자 가족의 유전자 변이 검사를 지원하고 있다.

ATTR-CM으로 진단받았다면 현재 국내에서는 '타파미디스(61㎎)'라는 성분의 경구용 약이 최적의 치료 옵션이다. 타파미디스는 트랜스티레틴을 안정화시켜 더는 침착하지 않도록 하는 약이다. 트랜스티레틴이 간에서 생성되기 때문에 간 이식도 고려할 수 있지만 실제로 많이 시행되지 않는다.

윤 교수는 "현대 의학에서 증상을 개선하는 치료제는 많지만 병의 경과를 좋게 하거나 입원율을 낮추는 등 예후를 개선하는 약은 많지 않다"며 "타파미디스는 병의 경과를 좋게 해준다. 심장벽이 더는 두꺼워지지 않는 등 개선점을 환자가 자각하기 힘들지만 심장초음파, 혈액 검사 또는 보행 검사를 통해 병이 더 이상 진행하지 않는 것을 객관적으로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서울성모병원에서 진단받아 논문으로도 보고된 실제 환자 사례를 들었다. 위암과 ATTR-CM이 동시에 걸린 환자였다. 국소 수술로 위암은 절개해 완치했고, 제약사의 무상 공급 프로그램으로 타파미디스를 처방받아 2년 가까이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윤 교수는 "예전이었다면 아마도 위암 완치 판정을 받고 나서도 이후에 심부전이나 원인 모를 이유로 돌아가셨을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타파미디스는 현재 건강보험 급여가 적용되지 않는다. 윤 교수는 "환자들에게 일단 제약사 무상 공급 프로그램 대기자로 등록하고, 나중에 급여 적용이 될 때까지 기다리자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무상 공급 프로그램을 기다리는 중에 병이 진행돼 사망하는 환자도 있다"고 덧붙였다.

보험 당국으로서는 급여 기준을 낮게 설정하면 재정에 부담이 돼 주저할 수밖에 없다. 윤 교수는 "당국에서는 타파미디스가 암세포를 없애는 항암제처럼 극적인 치료 효과가 없는데 계속 처방하는 것에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며 "건강보험심사평가원도 타파미디스 급여 필요성은 당연히 잘 알고 있겠지만 구체적인 조건이 고민일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윤 교수는 "환자 진료를 하는 의료진 입장에서는 더 오래 생존하고, 더는 입원하지 않는 효과가 임상 연구에서 입증된 치료제가 필요하지만 비용으로 인한 제한점이 많다"며 "진단 자체도 어렵고 치료제가 없는 것도 아닌데 급여 문턱마저 높으면 환자는 고가의 비용을 지불하고 치료제를 복용해야 하는데, 경제적인 이유로 약을 쓸 수 없는 환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국내에서 유전자 변이로 인한 ATTR-CM 환자 수는 많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보험 당국은 고령화로 인해 발병하는 일반형 환자의 진단율이 높아져 재정에 부담이 가는 걸 경계하고 있다. 윤 교수는 "유전자 변이가 있는 환자 대비 타파미디스 치료가 필요한 유전자 변이가 없는 환자 비율은 1 대 3으로 추정된다. 아무리 많아도 10배는 넘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며 "10배라고 해도 전국에서 600명 정도에 불과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어 "진단이 계속되고 환자 생존 기간이 늘어나면 누적 환자 수가 더 늘어나겠지만, 천명 단위에 머무를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급여 조건을 엄격하게 설정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